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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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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는 프랑스 군인으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청불 전쟁에 참전했다. 청불 전쟁에서 그는 통킹 원정군 제2여단을 지휘하며 박닌 전투, 흥화 점령 작전, 케프 전투, 누이 보 전투, 랑선 점령 등을 이끌었다. 1885년 깟루아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지휘 하에 있던 부대의 전술적 승리는 에르빈저 중령의 오판으로 전략적 패배로 이어졌다. 청불 전쟁 이후에는 통킹 원정군 제2사단 지휘관을 역임했으며, 러일 전쟁 당시에는 일본 육군에 배속되어 전쟁 보고서를 출판했다. 그는 병사들에게 인기가 많았으며, 뛰어난 전장 상황 판단 능력을 갖춘 지휘관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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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드 네그리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오스카 드 네그리에 장군
이름오스카 드 네그리에
원어 이름François Oscar de Négrier
별칭Maolen ("빨리!")
출생일1839년 10월 2일
출생지벨포르, 프랑스
사망일1913년 8월 22일
사망지노르웨이 연안
군사 경력
소속프랑스 육군
복무 기간알 수 없음
최종 계급사단장
지휘통킹 원정군 (1884년)
참전 전투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통킹 원정
수상알 수 없음

2. 초기 경력

1839년 10월 2일 벨포르에서 태어난 드 네그리에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프랑수아 아실 바젠 원수 휘하에서 복무했다. 메스에서 바젠이 군대를 항복시켰을 때 항복한 수천 명의 프랑스 장교 중 한 명이었으나, 이후 프러시아 포로에서 탈출하여 남은 전쟁 기간 동안 국방군에 합류했다.[1]

3. 청불 전쟁

밀로 장군과 참모들. 네그리에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네그리에가 뒤젠느의 분견대에 합류, 1884년 6월 27일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는 1884년 2월 통킹에 도착하여 통킹 원정군 제2여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청불 전쟁 이전의 선전포고 없는 적대 행위 기간 동안 박닌 전투(1884년 3월)와 흥화 점령 작전(1884년 4월)에 참여했다. 1884년 6월, 통킹 원정군 사령관 샤를 테오도르 밀로 장군은 박러 매복 소식을 접하고 하노이로 구원 부대를 파견하여 알퐁스 뒤젠느 대령을 지원하도록 그를 보냈다.[8][1]

청불 전쟁 중 케프 작전 (1884년 10월)에 참여한 세 개의 프랑스 부대를 지휘했다. 케프 전투 (10월 8일)에서 광서군 우익을 격파했고, 1885년 1월 누이 보 전투에서 승리했다. 1885년 2월 랑선 작전에서 제2여단을 지휘했으며, 동송과 박비에의 참호에 있던 중국군을 몰아내고 랑선을 점령했다.

루이 브리에르 드 릴 장군은 뚜옌꽝 포위전을 구원하기 위해 조반넬리 중령의 제1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갔고, 드 네그리에는 제2여단과 함께 랑선에 남았다. 1885년 2월 23일 랑선에서 진격하여 중국 국경과 가까운 동당에서 사기가 떨어진 광서군을 격파하고, 중국군을 통킹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잠시 광서성으로 건너가 정난관에 세운 의식용 문인 차이나 게이트를 폭파했다.[2]

1885년 3월 광서군을 증원했고, 3월 22일 펑쯔차이의 지휘를 받는 중국군 부대가 통킹으로 건너와 동당의 프랑스 전방 진지를 습격했다. 중국의 추가 침략을 막기 위해 국경을 넘어 방보 전투의 중국군 참호를 공격하기로 결정했으나, 1885년 3월 24일, 방보 전투는 유일하게 패배한 전투가 되었다.[3]

광서군은 조심스럽게 프랑스군을 추격했고, 나흘 후 랑선 방어에 정면 공격을 가했다. 1885년 3월 28일의 깟루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였지만, 드 네그리에는 중국군 진지를 정찰하던 중 가슴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폴 구스타브 에르빈저 중령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에르빈저는 랑선 철수를 결정하여 깟루아에서의 전술적 승리는 전략적 패배로 바뀌었다.[4]

3. 1. 청불 전쟁 주요 전투



프랑수아 드 네그리에는 1884년 2월 통킹에 도착하여 통킹 원정대 제2여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청불 전쟁 이전의 선포되지 않은 적대 행위 기간 동안, 박닌 원정(1884년 3월)과 흥호아 점령(1884년 4월)에 참여했다. 1884년 6월, 통킹 원정대 사령관 샤를 테오도르 밀로 장군은 박러 매복 소식을 듣고 하노이로 구원 부대를 파견하여 알퐁스 뒤젠느 대령을 지원하도록 그를 보냈다.[8][1]

청불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케프 작전 (1884년 10월), 누이 보 전투 (1885년 1월), 랑선 작전 (1885년 2월), 동당 전투 (1885) (1885년 2월), 방보 전투 (1885년 3월), 깟루아 전투 (1885년 3월)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3. 1. 1. 박닌 원정

1884년 3월, 드 네그리에는 박닌 전투에 참여하여 박닌 점령을 이끌었다.[8][1]

3. 1. 2. 흥호아 점령

드 네그리에는 1884년 2월 통킹에 도착하여 통킹 원정군 제2여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청불 전쟁 이전의 선전포고 없는 적대 행위 기간 동안 그는 박닌 전투(1884년 3월)와 흥호아 점령 작전(1884년 4월)에 참여했다.[1]

3. 1. 3. 케프 전투



청불 전쟁드 네그리에는 케프 작전 (1884년 10월)에 참여한 세 개의 프랑스 부대를 지휘했다. 케프 전투 (10월 8일)에서 드 네그리에가 직접 지휘하던 가장 큰 부대가 중국 광서군 우익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드 네그리에는 다리에 부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졌다. 그의 부대는 그가 죽었다고 믿고 케프 마을을 공격할 때 중국 수비병에게 항복을 허용하지 않았다.[1]

3. 1. 4. 누이보 전투

1885년 1월, 드 네그리에는 누이 보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이는 그의 대표적인 승리로 평가받는다.[2]

3. 1. 5. 랑선 점령

1885년 2월, 드 네그리에는 랑선 작전에서 제2여단을 지휘하여 통킹 원정군이 동송과 박비에 참호에 있던 중국군을 몰아내고 랑선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2] 프랑스군이 랑선을 점령한 직후, 루이 브리에르 드 릴 장군은 뚜옌꽝 포위전을 구원하기 위해 조반넬리 중령의 제1여단과 함께 하노이로 돌아갔고, 드 네그리에는 제2여단과 함께 랑선에 남았다.[2]

1885년 2월 23일, 드 네그리에는 랑선에서 진격하여 중국 국경과 가까운 동당에서 사기가 떨어진 광서군을 격파하고, 중국군을 통킹에서 완전히 몰아냈다.[2] 이후 드 네그리에는 잠시 광서성으로 건너가 중국이 안남과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정난관에 세운 의식용 문인 '차이나 게이트'를 폭파했다.[2]

3. 1. 6. 동당 전투

1885년 2월 23일, 드 네그리에는 랑선에서 진격하여 중국 국경 근처의 동당에서 사기가 떨어진 광서군을 격파하고 중국군을 통킹에서 완전히 몰아냈다.[2] 이어서 드 네그리에는 잠시 광서성으로 건너가, 중국이 베트남안남 사이의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정난관에 세운 정교한 의식용 문인 '차이나 게이트'를 폭파했다.[2]

3. 1. 7. 방보 전투

1885년 3월 23일과 24일에 벌어진 방보 전투는 드 네그리에가 군 경력에서 유일하게 패배한 전투였다.[3] 당시 청나라는 광서군을 증원했고, 3월 22일 펑쯔차이가 지휘하는 부대가 통킹으로 건너와 동당의 프랑스 전방 진지를 습격했다. 드 네그리에는 중국의 추가 침략을 막기 위해 제2여단의 주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 이들을 추격, 정난관 근처 방보의 중국군 참호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기습 효과로 병력 부족을 만회하고자 했다.[3]

3월 23일 프랑스군은 방보의 중국군 참호 외곽을 점령했지만,[3] 24일 중국군에 대한 추가 공격은 실패했고, 드 네그리에는 결국 퇴각해야 했다.[3]

3. 1. 8. 깟루아 전투

브리에르 드 릴 장군과 참모들.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이가 드 네그리에, 지팡이를 쥐고 있는 이가 에르빈저


1885년 3월 28일, 깟루아 전투는 프랑스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드 네그리에는 중국군 진지를 정찰하던 중 가슴에 총을 맞아 중상을 입었고, 지휘권을 폴 구스타브 에르빈저 중령에게 넘겨야 했다.[4]

현장 지휘 경험이 거의 없었던 에르빈저는 이성을 잃었다. 2여단 진지 앞에 천 명이 넘는 중국군 시체가 널려 있었고, 중국군은 깟루아에 작은 후위 부대만 남겨둔 채 혼란스럽게 국경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르빈저는 광서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했다는 증거를 무시하고, 제2여단이 포위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랑선을 포기하고 케프와 추의 더 강력한 방어 진지로 후퇴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에르빈저의 오판으로 인해 깟루아에서 드 네그리에가 거둔 전술적 승리는 전략적 패배로 바뀌고 말았다.[4]

4. 청불 전쟁 이후

드 네그리에는 뀌루아 전투에서 입은 부상에서 빠르게 회복했고, 청불 전쟁이 끝난 직후인 1885년 5월, 확장된 통킹 원정군 제2사단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리에르 드 릴 장군이 제1사단 지휘를 제안받았고, 드 네그리에가 제2사단을 맡는 것을 조건으로 수락했다. 드 네그리에는 루셀 드 쿠르시 장군 휘하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 그의 전술적 능력이 빛을 발할 기회가 많았던 중국 정규군과의 정규전을 치르는 대신, 그는 파악하기 어려운 베트남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징벌적 작전을 수행해야 했다.[1]

1885년 12월, 드 네그리에는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하노이 근처의 바이 사이 지역을 소탕했다. 이 작전으로 몇 명의 게릴라를 잡았을 뿐이었고, 드 네그리에 부대에서는 콜레라로 인한 프랑스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다. 격분한 프랑스군은 포로로 잡은 사람들을 총검으로 찔렀고, 게릴라전 전술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전통적인 군인이었던 드 네그리에는 이를 막지 않았다. 이 잔혹한 작전의 결과는 오히려 더 많은 지원병을 얻고 반군에 대한 동정심을 증가시키는 것이었다.[1]

드 네그리에는 러일 전쟁 동안 프랑스 무관으로서 일본 제국 육군에 배속되었고, 전쟁 직후인 1905년 런던에서 《러일 전쟁의 교훈》(Lessons from the Russo-Japanese War)이라는 전쟁 보고서를 출판했다.[1]

5. 리더십

드 네그리에는 청불 전쟁 당시 통킹 주둔 프랑스군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박닌 원정 이후, 통킹 원정군 병사들은 샤를-테오도르 밀로 장군과 두 여단장에게 베트남식 별명을 붙였다. 드 네그리에는 넘치는 활력으로 인해 '마올렌(mau lên, 빨리!)'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5]

드 네그리에는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언변을 구사했다. 1883년 12월, 프랑스 외인 부대 제2대대를 검열하면서 "여러분, 군인 여러분, 여러분은 죽기 위해 군인이 되었고, 저는 여러분을 죽을 수 있는 곳으로 보냅니다!"라고 연설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드 네그리에는 전장 상황을 즉시 파악하고 적절히 대응하는 능력(프랑스어 '쿠데유(coup d'oeil)')이 뛰어났다.[6]

성격은 급했지만 유머 감각이 뛰어나 부하들은 그의 불같은 성격을 즐겼다. 방 보 전투에서 전사한 르네 노르망 소위는 1885년 2월 랑선 원정 당시, 드 네그리에가 부대 집중을 지시하며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인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말한 직후 대포가 늪에 빠지자, 포병 부대에게 "오, 제발! 저 망할 것을 움직여!"라고 고함친 일화를 기록했다. 드 네그리에는 곧 웃음을 터뜨렸고, 이는 부대원들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7]

6. 저술 활동

드 네그리에는 러일 전쟁 당시 프랑스 무관으로 일본 제국 육군에 배속되었고, 전쟁 직후인 1905년 런던에서 《러일 전쟁의 교훈》(Lessons from the Russo-Japanese War)이라는 전쟁 보고서를 출판했다.[1]

참조

[1] 서적 Guet-apens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Lang-Son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Lang-Son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Lang-Son
[22] 서적
[23] 서적 Histoire militaire
[24] 서적 Conquête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Guet-ap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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